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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장의 앨범. 너무 많은 노래를 발표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한곡한곡이 내게는 피와 살처럼 소중하다. 잠들지 못한 나날, 고통에 찬 눈물이 얼룩져 있는 노래들.

결과야 어찌됐든 나는 늘 새로운 리듬, 새로운 감성의 음악을 만들어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80년대초 나는 실험적 감수성으로 충만해 있었다. 그 중에서도 [단발머리]는 트로트 일색인 우리 가요에 저항해 내놓은 첫 번째 실험작이었다. 멜로디보다는 리듬 위주로 만든 곡. 16마디에서 A-B-A로 반복하는 기존 대중음악의 고정관념과 한 테마에서 코드만 바꾸어 진행하는 케케묵은 시도들에서 탈출하고 싶었다. 생악기가 아니면 안 된다는 편견도 과감히 깼다. 신디사이저의 전자음악을 최초로 활용했고 [메이저 세븐]같은 당시로선 무척 낯선 코드를 과감하게 썼다. 그것은 60년대에서 70년대에 이르는 무명시절 쌓아온 음악훈련의 축적물이었다.

 

곡은 대히트였다. [오빠부대]를 탄생시킨 것도 이 노래로 그것은 10대들이 대중문화의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예광탄이었다. 대중들 역시 나처럼 새로운 노래를 원하고 있음을 절감하자 이제는 마음껏 내 뜻을 펼쳐도 되겠다는 판단이 섰다.

 

3집 앨범에 수록된 [고추잠자리]는 방송출연에 회의가 생겨 다시금 배낭하나 걸머지고 시골구석을 떠돌 때 만든 노래다. TBC라디오가 고운 노랫말 모집을 해 당선된 곡으로 전남 광주에서 상업미술을 하고 있는 김순곤씨가 작사한 것이다. [고추잠자리]를 만들 때 나는 이미 [산전수전 다 겪은 서른한살]이었다. 그때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가장 평온했을 때가 언제였던가.


그것은 수수깡 꺾고, 굴렁쇠 굴리고, 고추잠자리를 잡으러 뛰어다니던 유년시절이었다. 따라서 엄마를 부르고 고추잠자리를 부르는 것은 하나의 절규였다. 내가 노래하겠다고 하자 호적에서 지워버리겠다고 으름장 놓았던 우리 집안이나 독재로 얼룩졌던 우리 사회나 보수적이기는 매한가지였다. 그 갇힌 울타리속에서 엄마와 고추잠자리를 부르짖었고 나는 비로소 자유를 만끽했다. 그 용기는 [못찾겠다 꾀꼬리]로 이어졌다. 분노가 자신감으로 확장된 것이다. 이 노래는 집을 뛰쳐나와야 했던 내 마음을 그대로 밀어붙인 곡이다. [둥꾸따가 둥꾸따가]로 나가는 흥분의 리듬을 먼저 설정했고 첫 대목의 보컬에서 느낄 수 있듯이 아주 건방지게 불렀는데 그것은 당돌하게 살아야겠다는 내 의지를 담은 것이다.

 

이 노래가 담긴 4집에는 특별한 곡이 몇 개 더 수록돼있다. [기도하는~]다음의 짧은 휴지부에서 어김없이 터져 나오던 소녀들의 비명이 지금까지 귀에 맴도는 발라드곡 [비련], 유장한 템포로 설정된 비감 어린 애가 [생명], [광주사태]에 대한 분노를 담은 노래, 내 앨범을 통틀어 극히 보기 드문 곡으로 당대의 굴절된 사회상이 녹아들어 있다.

그 어두움의 반대편에 나의 첫 창작동요인 [난 아니야]가 수록돼있다. 나무 꽃 농촌 고향과 더불어 내 상상력의 원천이었던 동심. 나에겐 아이가 없고 앞으로도 없을 터이지만 아이들 만나는 것을 너무나 좋아했던 나에게 동심의 순수함은 자연처럼 아름답고 위대한 것이었다.

from 경향신문 | 19981120

URL: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8112000329126008&editNo=40&printCount=1&publishDate=1998-11-20&officeId=00032&pageNo=26&printNo=16596&publishType=00010